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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설레/날적이 (일상)

횡단보도에 서서 사랑하다.

 2010.05.09.



여름이 느껴지는 5월의 오후였다. 이마와 어깨를 훔치는 햇볕을 쓸어내리며 횡단보도앞에 섰다. 유난히 길었던 빨간 불과 파란 불 사이, 6차선 도로 한 가운데 비둘기가 죽어있다. 뭉개진 연탄 한 장 같은 시체 곁을 지난다. 맞은편 소망교회의 외벽을 장식한 싸구려 샐로판지 신(神)의 얼굴이 5월을 더욱 무료하게 하였고, 나는 횡단보도 위 검정 아스팔트와 하얀 페인트 위를 사뿐사뿐 밟는다. 도레미파하는 피아노 소리를 건너며 생각한다. 어느새 몇 시간 전의 역사(歷史)를 장식하며 화석이 된 그녀석의 사망원인을 생각해본다.

그 녀석은 아마 나처럼 무료한 5월의 어느 날, 어느때보다 길었던 빨간 불과 파란 불 사이를 날다 잠시 6차선 도로 한 가운데에 내려앉아 생각했을 것이다. 달구어지던 5월 도로 위에 내려 앉아 버스정류장의 한 사내와 분식집 처녀를 바라봤을태고 흘깃 샐로판지 예수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무료한 5월의 어느 날, 잠시 좀 전의 푸른 하늘을 생각했을 것이고, 기다림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아마 이 녀석도 나처럼 잠시 사랑을 생각했을까. 횡단보도의 파란 불을 기다리며 내가 생각해낸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다름아닌 그리움이였듯이, 그녀석도 울컥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을까. 무거운 사람들을 가득 싫어나르던 초록색 간선버스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파란 불은 어느새 빨간 불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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