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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유리창 (시선/생각)

《섹스 볼란티어》와 성적 상상


성적 상상

성매매 합법화나 낙태 합법화와 같은 논란 등에 참으로 많은 가치관이 개입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적이 있어요. 성의 담론이 진보 또는 개방적이라고 자처하는 공간에서조차 아직 남성과 여성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서로의 불편한 낯을 주고받는 경우가 다반사기도 하고요. 때때로 무척 공공해보이는 보수와 진보의 우스운 장벽에서도 성적 가치관의 경우에는 그 경계가 많이 혼랍스럽기까지 하죠.

개인적으로도 아는 척 할 수 없는 부분(아는척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① 말그대로 알 지 못한다는 것 ② 남성으로서 이미 왜곡된 성적 상상이 많이 진척되었다는 것 ③ 사회문화적으로 여전히 누구나 꺼리는 금기어에 속한다는 것 등의 세가지 부분을 포함한다.)이면서 항상 불편함으로 졸졸 좇아 다니는 '성(性)'은 '매춘(賣春)'이라는 용어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항상 성을 사는 입장에서가 아닌 파는 입장을 향한 비난의 대상으로 비추어지곤 했지요. 누구나 갖고 있는 삶과 생존의 욕구 중에 하나인 성적욕구가 언제부턴가 매매(賣買) 되어지며 여성의 몸(혹은 남성의 몸도 판다고 할 수 있겠지만)을 상품화하하기 시작하면서 보수와 진보,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인 사고틀에서 기득권유지 수단의 이데올로기로서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 속에서 순결과 정조의 말은 생명과 신앙과 같이 요구되어지며 사회와 가정의 유지 수단으로서 여성을 속박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겠죠.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는 사회와 남성이 역설적이게도 성매매 집장촌을 없애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저 또한 한 명의 남성으로서 왜곡되고 지배적인 성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그러므로 더욱 양성의 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를 갖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순히 신성한 성, 번식의 성, 순결의 성, 사랑의 성을

넘어서 성적 가치관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구체적인 피임법과 건강한 성관계 그리고 사회적 양육 시스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출산 선택권이 확대되는 생활의 성, 관계의 성, 평등의 성, 교감의 성으로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생활의 성으로서 우리는 '성적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려야 해요. 19세금지 딱지가 붙여진 포스터 옆 소년의 시선도 아니고, 밤거리 1차 2차 3차에 이어 네온사인 뒤 남성의 발길도 아니어야 해요. 그리고 관계의 성으로서 성적 주체들의 생각을 존중해야 해요. 성관계는 객체의 행위가 아닌 성적 주체들의 관계의 성으로 생각해야 해요. 수많은 제도 들은 성관계를 단지 국가의 인구조절 장치로 여성을 양육의 객체로 만들기에 바쁘지요. 또한 평등의 성으로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순결과 정조라는 인장의 딱지를 걷어야 해요. 순결과 정조라는 인장 뒤에는 여성의 몸은 남성의 상품 또는 소유물이라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어요. 주체적인 성인식을 갖는다면 성관계의 선택 역시 개개인의 몫이 되죠. 물론 이미 많이 진행된 남성의 잘못된 '성적 상상'과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제도적인 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하겠죠. 마지막으로 교감의 성으로서 손을 잡고, 어깨를 맞대고, 눈을 마주치는 대화의 성관계가 되어야 해요. 문장 그대로 사랑을 위해 성관계를 갖는 것과 성관계를 위해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저는 알지 못해요. 스스로 사랑은 지우거나 바꿀 수 있지만 대화는 상대방의 모든 것, 눈길과 억양, 행동과 옷차림 하물며 전 날 밤늦게 먹었던 고열량의 음식 이름과 몇 시간 뒤에 만날 친구와의 약속까지 대화는 언제어디서나 진행형 이죠.

사실 곰TV 등에서 무료로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있어서 이 영화를 보고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 것이 영화감상평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말만 길어졌네요.

섹스 볼란티어

제목은 《섹스 볼란티어》(Sex Volunteer: Open Secret 1st story, 2009)(www.s-volunteer.co.kr), 제목 그대로 약간은 도발적이거나 충격적인 그런 영화네요.  '불편한 장애인'의 성, 그것도 성을 자원봉사 한다니? 감독은 불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기이게 당연히 불편화 영화다라고 이야기 하네요.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불편한 장애인'에게 '성을 자원봉사'를 하는 것보다 그 속에서 상충하는 자신의 불편한 '성적 상상'이 아닐까요? 
내가 갖고 있고 분명 여러분들이 갖고 있을 성적 욕구를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요? 어쩌면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어느 장애인의 말하고 싶은 욕구의 고민보다, 멀쩡한 사지를 갖고서 말못할 욕구를 짊어진 우리 역시 또다른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젊은 영화 감독이 도발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면, 저는 어리석은 질문 하나 던져 볼까요?
"당신은 이 영화의 의도와 평행선을 지키며 끝까지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