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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아/책꽂이 (문학/노래)

빗방울을 흩다. 박태일



빗방울을 흩다
- 박태일
 
그녀 웃자 그녀 쪽 유리잔이 떨렸다.
그녀 고개 들자 내 잔 속 물이 떨었다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만났고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남는다
낮 두 시 찾집 베트남
그녀와 나는 할 말이 없다
창밖 인조 대숲에선 빗발이 글썽거리고
그녀 낮은 콧등처럼
그녀 외로움도 저랬을까
그녀를 두고 간 옛 남자의 반지 자국이
그녀 짧은 손가락 마디를 기어 나와
바깥 창 빗방울 잠시 흩는다
 


 
 상상해봐. 우리 각자가 기억하는 헤어짐의 상황을. 어느 정신과 의사가 확신에 차서 말한게 있지. "누구도 성격차이로 헤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래 맞는 것 같아. 누구도 성격차이로 헤어지지는 않아. 왜냐하면 모두가 성격차이를 알고 만났거든. 물론 세상 그 누구도 나와 너는 완전히 같거나 혹여 비슷하지도 않아.

  자 다시 상상해봐. 우리가 만났던 상황을. 사실 내가 너를 만났을 때 또는 너가 나를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같아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함께 영화를 보거나 함께 밥을 먹거나 아니면 함께 같은 우산을 쓸 뿐이지. 혼자 영화를 보긴 싫지만 너와 내가 상영작을 고르고 혼자 밥은 먹긴 싫지만 너와 내가 메뉴를 고르지. 그리고 밤늦게 전화를 해. 잘자라고.


 

  (그냥 이 시를 내 뜻대로 분석해봤어. 물론 나는 박태일이 누군지 몰라.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내가 쓴게 될 수도 있어. 다만 이 시가 80년대 발표된 것만 찾아서 알고 있어. 그러지않고선 저기 '베트남'이 무슨 분위기인지 알 수 가 없었거든.)

  여자와 남자가 만났어. 헤어지나봐. 비가 오는 날 둘은 조그만 찻집에 앉았지. 물론 여자도 남자도 헤어지는 상황을 알고 있는거 같아. 어쩌면 그래서 비가 내리는 거겠지. 시의 장치는 모두 의도한 거야. 인물도 배경도 심지어 띄어쓰기와 맞춤법도 의도하지. 한 소설가는 이런 얘길 해. "단순히 활자를 사랑하지 마세요.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것들도 많아요. 그것들을 읽어내는 것은 공감의 능력이고, 경험의 능력이에요. 침묵을 이해하는 것이 문학을 잘 이해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읽기는 나의 경험과 공감의 능력이지 독해력이 아니야. 하물며 활자를 해체하겠다고 나서는 시는 오죽할까.

  다시, 남자와 여자는 만났고 둘은 낮 두시에 '베트남' 찾집에 앉았지. 왜 '빠리 다방도 '뉴욕 제과'도 아니였을까. 80년대 베트남은 파괴되어 있었어. 많은 사람은 죽었어. 아니 죽임을 당했지. 남자와 여자도 그런거야. 둘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사랑을 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거야. 너와 내가 사랑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시간이지. 그럼 그 주인은 누굴까? 분명 저들은 그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 3시가 되지 않아 헤어졌을지도 몰라. 나같으면 사랑하는 여자를 낮 두시에 만나 찾집에 들어가진 않아. 길을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을거야.

  여자는 웃지만 웃는게 아냐. 애써 남자에게 웃어보였지만 촉촉하게 꼭 잡고 있었을 여자의 잔은 떨리고 있거든. 남자도 마찬가지야.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도 떨기는 마찬가지잖아. 여기서 남자와 여자가 떠는 건 설렘이거나 흥분이 아니야.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는 슬픔이야. 할 수 없는 두려움이지. 그래서 '그녀와 나는 할 말이 없다'는 역설이지. 전쟁은 용기가 필요하지. 하지만 그것은 약자에게는 필요 없는 말이야.

  남자는 여자의 콧등밖에 쳐다보지 못해, 콧등을 보며 여자를 생각하지. 여자를 위로하고 여자를 이해하지. 하지만 그녀의 짧은 손가락에 허옇게 남아있는 반지 자국을 보았지. 여자가 웃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하는 것도 남자가 여자의 콧등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도 모두 여자의 손가락에 남아있는 '옛 남자' 때문일거야. 그리고 여자를 두고간 빈 자리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를 베트남의 가난함으로 잔인함으로 남아있는 거지. 남자는 눈물을 흘려. 비가 왔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에게 낮 두시라는 시간은 해가 내리쬐거나 창 밖 인파가 바쁘게 다녀야 하는 시간이지 비가 내려야 하는 시간은 아니지. 그래서 애초에 비가 내리는 찾집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찾집에 비가 내리게 된거지. 남자가 여자의 콧등만 바라보다가 눈물이 고이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거야. 인조 대숲 화단이 보이고 그 화단에 빗방물이 글썽였지. 남자가 여자의 짧은 손가락에서 지울 수 없는 옛 남자가 스멀스멀 기억나오는 순간 서러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겠지. 그 때 빗방울을 창가를 흩어 지나갔겠지. 그래서 찾집 밖에 비는 내리지 않고, 다만 남자의 눈 안에서 비가 내렸지.

 사실 처음에 나는 이 시를 남자와 여자의 헤어지는 모습쯤으로 이해했어. 남자와 여자가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 헤어지는구나. 그래서 남남으로 만났다가 다시 남남으로 헤어지는 그런 이별 노래인 줄 알았어. 그런데 읽고 또 읽으면서 남자와 여자의 의자와 의자 사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숨어있는 침묵을 찾아보려고 하니.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한거지. 만나고 헤어지는 이별노래가 아니라, 만나고 그 만남을 그대로 남겨놓는 사랑노래라고 생각하게 된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남는다'는 한 줄을 너무 쉽게 읽어버린거야. 애초에 누구나 남남이었지. 어떤 눈빛을 보내도 다섯손가락의 깍지를 모두 포개어 잡아도 남남이지. 그런데 가끔 나도 남남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나봐. 남남이니까 사랑하지. 남남이여도 사랑하지.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만났고 /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남는다'에서 '남는다'를 '헤어진다'로 바꿨다면 어땠을까? 여자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옛 남자의 반지를 급히 뺐고, 남자는 환한 얼굴로 여자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인조 화단 대신 울긋불긋 꽃들이 놓여졌을까? 흩어지는 빗방울 대신 시내를 누비는 인파로 가득찼을까? 이 둘은 할 말이 너무도 많아. 문장으로 말하지 않은 말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는거야. 물론 우리의 자유지. 아까 말한대로 이때 우리는 나의 경험과 공감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나는 여러 번 읽고 또 읽어 본 결과 하나 중요한 걸 봤어. 시인은 이 시의 첫 줄에서 여자의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어. 이 이야기는 여자가 웃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어. 또 하나 자세히봐봐. 여자의 유리잔은 '떨렸'지만 남자의 유리잔은 '떨었'어. 남에 위해 떨린것과 내가 떤 것은 분명 남자가 눈치채지는 못 했지만 분명 눈으로 본 엄청난 차이야. 내가 위에서 얘기했잖아. 문학은 모든 것이 의도적이라고. 남자는 떨고 있지만 여자는 떨리는 속에서도 남자를 향해 웃어주었어. 그리고 고개까지 든거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외로움'을 생각하곤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지만, 여자는 옛 남자의 빈 자리에서 지금 여기 마주한 남자를 채워넣기 시작하고 있어. 그래서 시인은 아무도 모르게 '빗방울이 흩다'에서 흩어져 다시 해가 뜰 것임을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르지. 또 '남남으로 남는다'에서 만'남'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 시는 '여자는 웃었고, 남자는 잠시 빗방울이 흩었으나 그녀와 나는 남는다' 외에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자 다시 상상해봐. 우리가 만났던 상황을. 사실 내가 너를 만났을 때 또는 너가 나를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같아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함께 영화를 보거나 함께 밥을 먹거나 아니면 함께 같은 우산을 쓸 뿐이지. 혼자 영화를 보긴 싫지만 너와 내가 상영작을 고르고 혼자 밥은 먹긴 싫지만 너와 내가 메뉴를 고르지. 너와 내가 만났기 때문에 선택을 하게 되지. 고르게 되는거야. 나 혼자는 선택하거나 고르지 않아. 다만 정할 뿐이지. 그리고 밤늦게 전화를 해. 잘자라고. 매일매일 남남으로 일어나서 남남으로 인사하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