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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유리창 (시선/생각)

조카와 색칠놀이. 창의성은 생활에서.


 유치원에 입학한 조카가 왔다. 예전에는 뽀로로를 틀어주거나 던지는 공을 되굴려주면 그만이였는데, 확실히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활동을 하다보니, 전반적으로 개인위주의 감각지각 학습에서 단체위주의 체험활동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삼촌이 놀아주기가 더욱 힘들어졌고, 같은 말로 조금 더 신경써서 놀아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또래에 맞는 학습경험을 가져가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모 그건 유아교육을 전공한 유치원 쌤들이 가장 잘 아시겠지.) 사실 신경 쓸 환경도 아니고 놀아 줄 시간이야 항상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카가 볼 만한 영상물을 받아놓거나(백년만에 그래서 신데렐라와 인어공주를 혼자서 다시 봤다.) 색연필을 사놓거나 하며 단순한 '제공자'가 아닌 '놀이상대'로서 나도 조카도 서로 배울 수 있길 생각하곤 한다.


 열심히 색칠놀이(이걸 왜 보통 색칠공부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하는 조카가 생각나서 오늘은 수성펜을 가지고 큰 창에 낙서를 해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그려보라"보다는 "이 그림은 무엇이냐"라며 아이의 생각을 들어주어아한다는 것은 아이의 성장을 배려하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모든 과정이 그렇겠지만 알게모르게 어른이 체득하고 관습화한 모든 것(어쩌면 당연한 것)들이 사소하게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체험과 그때그때의 느낌을 막아서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하나가 색칠공부일 것이다. 예를들어 시중에 파는 색칠공부를 통해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들을 생각해보자. "정말 색칠 잘하는 구나", "이 언니는 누구야?", "우와 멋진 로보트네?"라는 말 하나만을 보더라도 결국 머리에 머리색을, 피부에는 피부색을 칠하고 있는 아이에게 머리색은 꼭 이 색이여야만 하고 피부색은 꼭 이 색이여야만 한다라는 암묵적인 지도와 노랑머리와 리본핀을 달고 있는 예쁜 언니와 바퀴 네 개 달린 자동차를 다시 한 번 약속하는 것 뿐이다. (다행히 뽀로로는 전혀 펭귄답지 않으며, 동물원에서 펭귄을 가리키며 뽀로로라고 하는 어른또한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일관되게 노란머리의 공주 아니면 사각형의 로보트만을 예쁘거나 멋있다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그 상품과 소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호빵같은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고 얼굴을 같이 칠해 보는 것이 훨씬 쉽고 유익한 색칠공부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모(최소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아이에게)는 자기 아이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누구나 갖고 있다. (물론 수많은 아동 교육기관이 그런 부모가 없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아이와 대면하며 온전히 놀수 있는 여유로운 부모가 없어 진것이 문제이며 과도한 불안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동교구라며 상품화되는 모든 것들이 엄마가 부엌에서 하는 것들을, 아빠가 회사에서 하는 것들을 그대로 옮겨온 것 뿐이지 않은가. (물론 또 이것은 사회적으로 차별 또는 유형화된 성담론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예를들어 주방완구를 가지고 노는 여성 아이에게 여성으로서 가정일은 내재되는 것이다.) 생활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창의성은 결국 상품화와 성별화를 통해 재생산의 도구가 된다. 아동교구의 대량 상품화 이전부터 전통적인 아동 교구인 가베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어쨌든 생산과 소비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생산자는 개별보다는 전체를 추구하기 때문에 아동의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선 더욱 지혜로운 소비자로서 부모가 필요하다. 여기서 부모의 교육관이 관여를 하겠지만 어쨌든 나의 아동관과 교육관은 '아동의 성장단계에 맞는 자유로운 경험과 신체활동을 통한 창의성의 발현'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바쁘게 짜여진 우리사회의 유치원-초등-중등 교육과정에서 그 창의성의 발현이 얼마만큼 들어맞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부모가 자발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며 모든 감각과 모든 사고가 자신에서 세상으로 발산되는 '아동 시기'에서만이 '창의성의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글을 보는 모든 사람이 다녔던 초등학교 이후의 교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하다.

 다시 색칠공부로 돌아와, 상품으로 구매하여 고정된 틀에 예상되는 색칠을 하는 반복과정이 '창의' 보다는 '습득'만을 목표로하며 그로써 어떤 사회화 유형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유리구두를 신어야하며 왕자에게 사랑받아야만 하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의 색을 칠하고 칭찬받고 버리는 반복학습보다는 하얀 도화지 위에 자신의 하루와 자신의 주변을 아무렇게나 그리고 칠하며 아이의 성장일기가 되는 것이 어떨까? 이는 부모에게 그림과 색칠을 통해서 내 아이의 현재 상태를 알게 해주는 가장 의미있는 선물도 주어지게 될 것이다. (예를들어 가족을 그리며 엄마의 얼굴은 크지만 아빠의 얼굴은 너무 작게 그린다든지, 엄마와 아빠의 가운데 나를 그려놓고 내 동생은 저 멀리 그린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또한 하얀도화지가 아닌 주변에 큰 창문 위에 그림을 그리게하고 또 지우게하는 것은 어떨까? 좁디좁은 하얀도화지 위에 정형화를 강요하는 그림보다 얼룩지고 미완성된 그림이라도 자기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지워가며 창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더 이상 그 창문은 우리집을 닫고 있는 벽이 아니라 세상 그대로를 보여주는 소통하는 창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 이미 최고의 '창의적 도화지'가 되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리고 계절마다 조금씩 그러나 언제나 변하는 창문 밖의 세계를 마주하고 자기 손으로 지우며 그려나가는 그림이야 말로 가장 소중한 아이의 성장과 활동이 아닐까? 다음은 삶은 계란을 잔뜩 삶아놓고 부활절 계란놀이를 해봐야겠다!

 OECD 국가 중에서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꼴찌인 나라. OECD 국가 중에서 어른의 노동시간이 최장시간인 나라. 어쩌면 부모와 아이가 불행한 사회에서 국가와 구조를 탓할수 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도 문제이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교육의 본질을 되묻는다. 선생이 되겠다는 나에게는 참 씁쓸한 전망이지만, 머지않아 학교의 붕괴(그것이 단지 신뢰의 문제일지라도)는 곧 가정의 교육으로 되돌아 갈 것이며, 단체보다는 개인을 지성보다는 인성의 교육이 될 것이며, 사회화의 가장 큰 덕목은 창의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