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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유리창 (시선/생각)

5월1일은 노동절. 인터내셔널.


누구에게는 투쟁의 장, 또 누구에게는 기념의 장, 또 누구에게는 축제의 장일 수 있는 노동절
중요한것은 매년 되풀이되는 5월의 '만국의 노동자 권리'와 11월의 '전태일 열사 계승'이 헛된 구호가 되면 안되는거겠죠.
우리의 연대 속에서 즐겁게, 그렇지만 우리의 노동현실 속에서 힘차게 진행되고 관심받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아래는 서울에서 4월 30일과 5월 1일에 메이데이관련해서 몇군데의 집회 웹자보를 퍼왔습니다.

1. [4/30(토).오후2시.서울역]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현실화! '4.30 투쟁결의대회'
2. [4/30(토).오후6시.홍대거리] 청년들에 의한, 청년들을 위한 '4.30 청년 페스티벌'
3. [4/30(토).오후8시.시청앞] 재능교육 비정규직 투쟁 승리를 위한 '메이데이 전야문화제'
4. [5/1(일).오후1시.보신각] 노동자는 하나! 세계노동절기념 '이주노동자대회'
5. [5/1(일).오후3시.시청광장] 121주년 세계노동절기념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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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5월 1일 노동절)의 유래


1886년 미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장시간의 노동에 허름한 판잣집에서 방세 내기도 어려운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상이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다음날 경찰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가 참가한 평화집회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889년 세계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는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한 미국 노동자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했다. 그리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였다.

일제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노동절의 역사


△한국 최초의 노동절행사 -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노동연맹회’ 주도하에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굽힘없이 투쟁하였다.
△이승만 정권 하에 대한노총이 주관하는 노동절 - 1957년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하라”고 한국노총에 지시했다. 이승만이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한노총은 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결정했다.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뀌고! -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노동절의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꿨다. 이제 더 이상 단결과 투쟁의 자랑스런 노동자가 아니라, 정부와 자본의 축제에 들러리 서주는 불명예스런 근로자가 된 것이다.
△1989년 제100회 노동절 전통 회복 선언 -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 전쟁이후 단절되었던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1994년 5월1일을 노동절로 - 그러나 노동절은 아직도 ‘근로자의 날’로 불리우고 있어 ‘노동절’이름을 되찾기 위한 과제가 아직도 남겨져 있다. 그 이후 민주노조는 해마다 노동절 정신계승과 노동자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힘차게 전개해오고 있다.




 

인터내셔널가 _ ♪ 붉은군대 코러스

기립하시오!  당신도 노동자요,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