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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유리창 (시선/생각)

당대회를 했다는데,

(*진보신당 당대회 안건이라도 읽어보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권한이 없단다. 아참, 나 탈당하고 아직 재입당을 안하고 있었구나. 뭔가 허전하다. 트윗이나 페북에서 종종 보이는 당대회 후기는 '서로'를 향하여 할 말이 많은 듯 하다.)



 학교에서 잠시 기간제를 하느라, 잠시(?) 탈당계를 낸 뒤로 쭈욱 재입당을 하지 않고 있다. 곤궁하고 비루한 삶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앞에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좋아하는 당들 사이에서 벌이고 있는 몇 가지 ‘단어’들과 관련해서 그것을 관망해보고자 하는 고질적인 나의 몹쓸 태도가 도진 것도 작은 이유라면 이유겠다.

 진보신당 창당 당원이 된 것은 사회에 내던져 질 졸업 청년의 작은 고민과 쉬운 판단에서 나온 시기의 문제였다. 다행히 지역에서 즐거운 당 사람들과 소중한 연을 맺고, 작은 고민과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2년내내 누구보다 모범병사였던 친구가 전역해서야 선배가 갈겨 준 ‘썩으러 가는 길’의 시를 곱씹어 볼 수 있듯이, 특정 공간의 ‘선택과 배제’가 규정했던 사소한 것들이 그 공간 밖에서 한 발 빼니 조금은 주전부리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던 길동씨나 어느날 갑자기 대공분실로 끌려가 사지가 떨어지는 고문을 당했던 그분들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를 규정하는 시대와 나를 규정하는 수많은 공간과 관계 속에서 ‘작은 실어증’을 갖고 사는 것 같다. 이러한 ‘실어증’ 속에서 국가보안법과 같은 희한한 폭력은 그것을 악법이라고 규정짓는 이들조차 서로를 갈라서게 한다. 때론 그 ‘선택과 배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무엇이 명확하다거나 무엇을 드러내는 효율적인 수단이 되겠지만, 때론 그 ‘선택과 배제’가 무수히 언어를 내뱉으며 사는 인간들의 좁답한 틈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을 나누고 줄세우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작두를 타는 무속인의 발바닥에 굳은 살이 있었는지는 알 지 못하지만, 정교하게 단위를 새긴 유리자 위에 서야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두 발은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다. 삶의 좌표도 좋지만 삶의 궤적 또한 함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름다운 삶 아닐까?

 언어는 애초에 분절적이고, 그 언어에 기댄 인간은 언제나 편파적이다. 하지만 숫자 ‘1’이 없으면 숫자 ‘2’도 있을 수 없고, 숫자 ‘2’가 없으면 숫자 ‘1’은 설 곳이 없다. 혹여 여러 획이 함께 모여 의미를 만들어 내는 한자도, 자음과 모음이 사이좋게 모여 글자를 만들어내는 한글도, 그리고 단어의 알파벳의 배열따라 발음마저 달라지는 영어도 각자 자기 자리가 있음과 함께 서로 어울려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언어를 내뱉으며 사는 인간이 자기 자리 없이 무수한 말뭉치만 만드는 것도 경계해야 겠지만, 의미를 ‘이야기’가 아닌 ‘단어와 문장’ 속에서만 찾으려는 인간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보작당이든 진보쉰당이든 도로민노당이든 민주당 2중대든 부디 흑백 토너가 활자를 토해내는 몇백장의 복사지 같진 말았으면 한다. 삶과 투쟁에서 우리는 어지간히도 손 잡았고 울었지만, 내가 규정할 때마다 우리는 갈라섰고 투쟁은 너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