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을 보니/신발장 (현장/사회)

"장수 떠난 성, 우리 의병돼 지키자" <레디앙/김상봉>

"장수 떠난 성, 우리 의병돼 지키자"
[긴급 기고] 진보신당 당원들께 "분노 잠시 덮고, 전화기 듭시다"

어제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보신당의 얼굴이나 다름없던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유시민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후보직을 사퇴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의 정치 행위로서 그 결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하지만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당 내에서 공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결정이요, 당이 후보자 개인의 사사로운 결단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런 정당은 더 이상 공당이 아니라 사당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진보신당은 그런 정당이 아니며, 또 그런 정당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 김상봉 상상연구소 이사장(전남대 교수)
로마 시대의 장군이었던 카툴루스 루크타티우스가 킴브리아와의 전쟁에 나갔을 때, 압도적인 적의 위세에 눌려 그의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병사들 사이로 들어가 같이 달리면서 로마의 병사들은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후퇴하고 있노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휘관으로서 자기 병사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무질서한 도주행렬을 질서정연한 후퇴의 대열로 만듦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새로운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적의 위세에 눌려 앞에 서 있던 장수가 먼저 도망을 쳐버린다면,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한국의 진보 정당이 성장하지 못했던 까닭은 진보 정치인들이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항쟁 때 많은 농민군들이 자기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전봉준을 따라 갔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전에는 결코 이 비루한 삶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자기들이 걸어야 할 길과 그 길의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전봉준이 마지막까지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보, 분열이 아니라 리더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진보 정치인들은 너무 쉽게 자기가 들고 있던 깃발을 버리고 자기가 있던 자리를 떠납니다. 그들이 떠나는 곳은 그들이 혼자 갈 수는 있어도 우리가 같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때마다 자기를 믿고 따라 달라고 말합니다.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따라 우리가 어떻게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따라 나설 수 있으며, 언제 내려질지 모르는 임시 정당의 깃발을 누구더러 같이 들고 지키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영리하고 아무리 열정적이고 아무리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믿음이 없고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진보 정당 운동이란 한갓 역사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도 쉽게 우리의 진보 정치인들은 자기의 깃발을 버리고 제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들에겐 늘 떠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가진 것 없어 떠날 곳이 없는 사람들만이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적의 침략 앞에서 장수들이 도망쳤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싸웠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겐 도망갈 곳도 떠날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거기서 살고 죽어도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기 땅을 죽음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명박을 심판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리고 이명박을 심판하기 위해 될 사람, 될 정당에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입으로만 이병박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거대 야당에 입당하여 그들을 비판하고 독려하는 일입니다.

소수정당 욕하기 바쁜 무능한 거대 여당

하지만 이 나라의 거대 야당들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에 너무도 능수능란하고, 그런 정당의 지지자들 역시 수백만 명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겨자씨만큼 작은 진보신당의 당원들이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분파주의자들이라 비난하는 데 지칠 줄을 모릅니다.

존재는 평면이 아니라 깊이이며, 시간은 현재 속에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같이 품고 있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정당은 오늘의 적과 싸우지만 또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진보신당은 미래의 정당입니다.

우리가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또는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에 몸을 담고 있는 까닭은 저 정당들이 더 이상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정당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명박의 독재를 심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뒤에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 시대의 모순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낡은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그것은 예전의 싸움이 지나가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의 독재를 입에 올리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명박을 심판해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하지만 이명박은 박정희도 아니고 전두환도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본과 재벌과 삼성과 이건희의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머지않아 이 땅의 시민들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서로 물을 것입니다. 누가 이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그 때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는 잠시 접고, 전화기를 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갈 곳 없는 우리가 흩어지지 말고 그날을 위해 참고 견디며 성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2.94%보다는 3%가 낫고 3%보다는 5%가 낫습니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후보와 정당지지율이 10%를 넘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한명숙이나 유시민 후보의 당선보다 이명박에게는 더 큰 현실적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상정 후보의 사퇴에 대한 분노는 잠시 접고 이제 남은 하루 동안 전화기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보신당을 지지해달라고 한 번 더 간절히 호소해주십시오. 그리고 진보신당이 무엇하는 당이냐고 묻거든 어려운 말씀은 다 접고 단 한 마디 진보신당은 삼성의 범죄자 이건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싸우는 당이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리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거대야당들이 시도지사 한 두 자리 더 얻는 것보다 진보신당이 10%를 얻는 것이 이명박에겐 훨씬 더 실제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보신당이 누구의 정당이냐 묻거든 노회찬도 조승수도 심상정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정당이요, 우리 모두의 정당이라고 대답해주십시오. 장수들이 떠난 자리에 갈 곳 없는 우리가 의병이 되어 성을 지킵시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김상봉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