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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유리창 (시선/생각)

무소유를 소유하라


  

  법정 스님께서 집착을 놓으라 하셨고, 욕망을 버려라 하셨고, 마음을 비우라 하셨다. 글쎄 집착과 욕망에 관대해진다면 더욱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만, 밤새 작은 모니터 너머를 이리저리 헤매는 나를 돌아보니 그것은 '죽음과 입적'만큼의 거리만큼 먼 경구일 뿐이겠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철저히 소유하는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단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유'에 반하는 대안적 삶을 '무소유'라 생각한다면 나는 옳다고 그것이 옳은 길이다 생각한다. 하지만 한 사회에서의 대안이 과연 그 사회를 넘거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인지는 생각해 볼 만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실천적 삶은 주체가 아닌 타자가 되어서야 그를 평가 내릴 수 있지만, 어느 한 개인의 '무소유적‘ 삶의 평가가 수많은 타자가 '소유'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이 되는 모순된 현상을 우리는 지켜봤다. 따라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과 무소유를 소유하는 것은 주체와 타자의 영역만큼 별개 이상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타자는 평가하듯이 소유할 뿐이라면 주체가 되어서야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법정스님은 '지금 여기'에서 '행동'하라고 말한다. 즉 생각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 뿐이고 실천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이 실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발 딛고 있는 생활에 집중하며 한걸음씩 내딛을 때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예수도 그 드넓은 고행의 땅에서 사랑을 실천의 영역으로서 순례 하며 수많은 약자와 고통받는 이 들 앞에서 몸소 사랑하였고 희생하였으며 손 잡아 주었다. 이것이 라틴어가 되어 금색띠 두른 성경책에 박혔을 때 그들은 사랑을 '기적'이라 치장하였고, 사랑은 실천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으로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생각해보자. 깨달음은 반성의 토대 이에서 자라며, 현실생활과 환경 속에서 맺어진다. 당신이 나 또는 내가 당신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개념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서로를 이해한다'라고 칭하기도 한다. 숫자 '1'이라는 개념이 또 다른 수 '2, 3...'의 개념 없이 설명 될 수 없듯이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다면, '사람'이라는 단어 자체는 참으로 의미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람'이지만 '나'와 '너', '우리'라는 단어가 반드시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확히 개별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수많은 '나'와 '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분명한 자본주의 사회다. 개별적인 '사람'으로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자체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대형서점에 진열된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서 지갑을 여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법정스님과 관계맺기를 꺼리는 대신 '무소유'라는 상품의 당당한 소비자로서 권리를 요구한다. 하필 한 개별자가 '무소유'를 깨달았다한들 그것이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소유’라는 유통구조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대신 기도를 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대신 무소유를 소유한다.



  여기서 누군가 “나는 어떤 정신적 물질을 깨닫기 위해 지갑을 열 필요가 없다”라고 자신있게 말한다고 치자. 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위의 법정 스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법정 스님께서 집착을 놓으라 하셨고, 욕망을 버려라 하셨고, 마음을 비우라 하셧다. 글쎄 집착과 욕망에 관대해진다면 더욱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왜냐하면 집착과 욕망은 왜 생기는지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소유, 나와 너가 그리고 우리가 소유할 수 없이 다만 '사람'으로 소유하길 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를 계급과 계층으로 대신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 역사는 여전히 또다른 미래를 향해 치닷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대신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지 반문하자. 무소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대신 무소유를 소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나’와 ‘너’가 ‘우리’로 묶인다면 사랑과 무소유의 영역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