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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니/신발장 (현장/사회)

김예슬 읽기, 속물과 동물 사이 어디쯤

[20호] 2010년 05월 10일 (월) 11:34:52 엄기호/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info@ilemonde.com



우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끝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해피엔딩이다. “임금님은 발가벗었다”고 아이가 외치자, 임금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보고도 외면했던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임금은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외친 아이는 큰 상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임금이 끝까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결론은 어떠했을까? 벌거벗고 행진을 하던 임금이 아이의 외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면, 거리에 서 있던 백성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김예슬 선언’에서 만난다. 대학은 김예슬의 선언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반응을 보이면 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정작 웅성거린 것은 대학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다. 임금님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저 아이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와 기억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김예슬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는 이들의 시선과 욕망을 드러낸다. 누구는 환희에 차서 이야기하고, 누구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누구는 시샘이나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런 점에서 김예슬 선언이 드러낸 것은 김예슬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균열이다.


타락한 386의 보상심리

 

   
▲ <레오니 도네를 위한 수수께끼>, 1858- 빅토르 위고
무엇보다 열성적으로 김예슬을 응원한 것은 386세대다. 이들의 시선에는 대다수 대학생에 대한 불신 혹은 무시와, 자신의 삶이 타락했다는 씁쓸한 회고가 교차한다. 이들에게는 김예슬의 선언이 현재의 무력하고 탈정치되어 희망을 잃어버린 대학 사회에 내린 단비다. 다른 한편으로 김예슬을 보면서 과거 기득권을 부정하고 정의를 추구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는 세상과 타협하고 자신의 아이에게 공부하기를 강요하던 것을 반성한다. 비록 자신은 타락했지만 김예슬이 꿋꿋하게 버텨주기를 응원한다. 김예슬은 386의 진정한 후배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현재 ‘비겁’을 자신의 후배의 ‘용기’를 통해서 보상한다.

 

반면 20대의 시선은 각자의 처지에서 대단히 분열적이다. 김예슬의 선언을 ‘대단하다’고 받아들이면서 ‘난 그렇게 할 용기가 없다’는 고백에서부터 ‘책 내기 위해 쇼한 것 아니냐’는 냉소와 불신의 시선까지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나아가 날카롭게 김예슬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386들과 진보적 언론의 엘리트주의가 가진 퇴행적 성격을 지적하는 주변부적 위치에서의 발화도 있다. 예를 들어 연세대 원주캠퍼스를 다니는 정혜교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1)을 통해서 “김예슬이 아니라 당신들의 행동에 훼방을 놓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김예슬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을 거부하고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지잡대’(지방잡대)로 분류되는 자신이 대학 거부 선언을 해도 이 정도의 관심을 보여줄 것이냐”고 묻는다. 그는 김예슬의 진정성에 감탄하고,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진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문에 붙이며 그들의 문화적·사회적 보수주의를 폭로한다.


선언을 둘러싼 20대의 분열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20대 문제는 대학생 문제로 환원되는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노정태의 글(2)이 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백혈병으로 쓰러진 고 박지연씨는 단 한 번도 20대 혹은 ‘노동하는 젊은이’로 호명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대해서 ‘안됐다’는 수준의 이야기와 그런 희생을 만든 삼성에 대한 비판이 주종을 이루지만 여전히 그들을 ‘주체’로 담론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대학 위기’ 담론 속에서 대학생이 주체로 가정되고 기대되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불공평한 만큼 ‘세상과 싸우는 우리의 시선’도 불공평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균열에서 진보는 균열과 함께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첫 번째로 ‘대학 위기 담론’의 허구성이다. 우리 모두 ‘대학이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김예슬 선언’ 자체는 이런 가장 무도회에 대한 사망선고다. 김예슬이 ‘대학이 죽었다’고 선언하자마자 ‘대학 위기 담론’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교수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이 ‘사망’했다고 말하지 않고 ‘위기’에 빠졌다고 말해왔다. 이 담론이 오히려 더 불온하고 우리를 퇴행시킨다. ‘사망’과 ‘위기’는 전혀 다르다. ‘사망’에 필요한 것은 ‘애도’고 ‘위기’에 필요한 것은 ‘치료’다. ‘위기’ 담론에서 여전히 대학은 회생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회생시킬 수 있는 주체가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노정태가 이야기하듯 대학생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주체로 가정되는 반면에, 대학 밖 주체들은 주체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애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사랑, 혹은 새로운 실천이 지체되고 있다. 정혜교와 노정태가 불신을 드러내는 김예슬 선언에 대한 ‘진보 담론’의 재현 방식이 죽은 대학을 여전히 살리려는 헛된 노력의 퇴행성을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

두 번째로 해체된 ‘대학’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대학 서열 체제’이다. 과거 대학의 안과 밖을 나누는 차이가 대학생을 단일한 주체로 묶어주었다면, 이제는 대학 안의 차이가 훨씬 더 현실적 차이로 작동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대학생들이 벌이는 뜨거운 논쟁이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따위로 재현되는 대학 서열 논쟁이다. ‘광명상가’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마지노선에 걸쳐 있는 대학이며, ‘한서삼’은 서울에 있지만 서자 취급을 받는 최하위 3인방이며, 이 서열의 마지막에는 대학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이하잡’(3)이 있다.

대학생의 정체성은 대학의 안과 밖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서열 체계 ‘안’에서 내가 다니는 대학이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대학생들은 ‘훌리건 천국’과 같은 카페를 필두로 해 다른 대학을 ‘까’고 전략적으로 ‘적의 적’을 옹호하는 ‘배틀’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지잡대’생이 명문 ‘고려대’생의 용기 있는 행동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 서열이 인생 대부분의 차이와 차별을 결정하는 현재의 체제에서 자신은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가 훨씬 더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사회 안에서 동질적 집단으로 대학생이라는 공적 위치와 헤게모니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집단 내 차이로 움직이는 사사로운 존재로의 대학생이다.


대학생-비대학생, 명문대-지잡대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김예슬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20대들의 시선이다. 수업시간에 김예슬의 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결국 책 썼잖아”라는 냉소였다.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자, 수강 학생의 3분의 1이 손을 들었다. 이들에 따르면 김예슬은 요컨대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공적 존재가 아니다. 치밀한 계산에 따라 손해본 것 하나 없는 장사치이다. 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한국은 졸업이 아니라 입학이 더 중요한 사회다. 그렇기에 그녀의 자퇴가 그녀가 고려대를 입학할 정도로 똑똑한 학생, 유능한 인재라는 것에는 아무런 생치기를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이 자신의 똑똑함을 받쳐주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고 촌스러운 공간임을 증명함으로써 그녀는 더욱 도드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김예슬은 ‘대학을 거부한 젊은이’가 아니라 ‘글을 참 잘 쓰는 부러운 또래’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김예슬이 무엇에 대해 어떤 선언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녀가 소유한 ‘글쓰기 솜씨’라는 아이템이다.

여기서 속물을 넘어선 동물을 만나게 된다. 근대적 인간의 궁극적 소실점으로서 속물들은 형식화된 가치를 따른다. 속물은 사망한 대학을 여전히 위기라고 말하면서 허구적 대립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부정하고 고뇌하는 주체로 자신을 재현한다. 그래서 공적 주체인 척할 수 있다. 동물은 다르다. 속물이 여전히 인간이기에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면, 동물은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 욕망에는 타자가 필요하지만 욕구에는 타자가 필요 없다. 다만, 욕구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킬 사물-아이템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 동물들의 눈에는 김예슬이라는 타자는 사라지고, 다만 그가 손에 쥔 아이템이 보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타자 없이 공적 주체는 발생하지 않는다. 동물은 공적 주체일 수 없다. 그래서 속물들은 인간이 동물로 퇴행했다고 개탄한다. 사실 동물은 ‘소비자의 요구가 가능한 한 타자의 개입 없이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4)된 결과 생긴 속물의 미래이다.

김예슬 선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속물이 동물을 비판하고 동물이 속물을 냉소하는’ 미궁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속물이 인간의 탈을 쓴 동물이라면 동물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속물이다. 속물에게 인간은 알리바이에 불과하며, 동물에게 인간은 불필요한 가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예슬은 자신의 선언 후반부에서 대학 문을 나오면서 자신은 ‘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 ‘인간’은 아직 속물과 동물의 사이에 있다. 이 ‘사이’가 그 ‘인간’이 갇히는 감옥이 될지 또는 속물과 동물의 탈출구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무엇보다 김예슬조차 상투적 의미에서 불쑥 사용했을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걸 주저 없이 안다고 말하면 속물이고, 관심 없다고 말하면 동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지, 그 가능한 인간은 무엇인지를 묻는 진부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당혹스러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였다. 따라서 이것은 철학적 사건이다. 다만 이 사건의 미래는 김예슬에 대해서, 혹은 김예슬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떠들고 있는 우리들이 낡은 질문과 해답에서 얼마나 새로운 것을 구분해내고 시작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새로운 것을 가려내는 단절의 힘, 우리에게 그러한 언어 혹은 철학이 있는가? 김예슬 선언을 둘러싼 담론의 균열은 우리에게 ‘철학적 사건’은 있었지만 ‘사건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 여기가 우리가 새것을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 아닐까.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왜 김예슬의 대자보에만 주목하나’,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50064.
(2) ‘김예슬 vs 고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 공통점은?’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409091638&section=04.
(3) 대학별 범주와 해석은 일반적으로 알려졌지만 지난해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을 같이 공부한 안도영 학생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상기시켰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중앙대·경희대·외국어대·시립대’이고 그 사이의 ‘/’는 대학 사이의 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서연고’는 명문대이고 ‘서성한’은 준명문대이다. ‘광명상가’는 상가 이름이 아니라 광운대·명지대·상명대·가톨릭대이며, ‘한서삼’은 한성대·서경대·삼육대이다. ‘지잡대’는 지방 잡대이고, ‘이하잡’은 말 그대로 ‘이하 잡대’를 의미한다.
(4)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150쪽,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