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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아/서랍장 (국어/교육)

[진중권] 도상, 지표, 상징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나오는 얘기다. 아득한 옛날 한 소녀가 살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내가 먼길을 떠나게 된다. 전쟁터로 떠났다고 했던가? 어쨌든 연인과 보내는 마지막 밤. 이제 동이 트면 둘은 헤어져야 한다. 소녀는 연인을 곁에 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영원히 곁에 둘 수 있을까?  그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소녀는 촛불로 사내의 몸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펜으로 그림자의 윤곽을 떠 사내의 윤곽을 얻어낸다. 그러자 도공이었던 여인의 아비가 그 실루엣을 바탕으로 사내의 부조를 만들어 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그림 혹은 부조는 사내를 대신하는(stand for) 어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사내의 ‘기호’라  할 수 있다. 그 그림은 곁에 있다가(present) 부재하게 된(absent) 사내를 다시 존재하게(represent)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사내의 재현(representation)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알베르티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눈앞에 생생히 다시 갖다 놓는 회화의 신성한 힘(forza divina)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저 여인도 아마 그 그림에 눈을 돌릴 때마다 사랑하는 연인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체험을 했을 게다. 


  현대예술은 어떤가? 대상성이 사라진 현대예술도 여전히 '기호'라고 할 수가 있을까? 과거에 '그리다'라는 말은 목적어를 가진 타동사였는데, 오늘날 그 말은 자동사가 되었다. 가령 칸딘스키의 그림을 생각해 보자.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대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형과 색의 순수한 유희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사물인 셈이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기호를 만들어냈다. 현대의 화가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물을 창조하려 한다. 이렇게 대상성을 잃은 현대예술은 기호가 아닌 새로운 사물,  일종의 '오브제'가 된다.


  '오브제'라 함은 원래 예술의 영역에 들어온 자연 혹은 일상의 사물을 가리킨다. 지난번에 얘기한 뒤샹의 변기를 생각해 보라. '오브제'는 글자 그대로 대상이다. 기호란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대신하는(stand for) 것이다. 하지만 변기가 변기를 대신할 수는 없는 일. 변기는 변기일 뿐이지 변기의 기호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단토에 따르면 모든 오브제는 일종의 '은유'라고 한다. 뒤샹이 미술관에 들여온 그 변기도 실은 온갖 가지 '의미'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로 그래서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변기 역시 모종의 의미작용을 하는 일종의 기호라는 얘기가 된다.


  다시 칸딘스키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순수한 형과 색의 구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칸딘스키가 그 작품으로써 (칸트가 말하는) 순수한 형식의 유희를 하려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그 시각적 구성을 통해 그는 어떤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작품에 담으려 한 그 "정신적인 것"이란 세기가 바뀌던 즈음에 러시아 풍토에서 자라난 어떤 신비주의 사상으로 안다. 따라서 비록 대상을 가리키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어떤 고차원적인 정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인 셈이다.


  미국의 기호학자 퍼스에 따르면 기호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유사성을 토대로 지시작용을 하는 도상(icon)이다. 가령 우리는 문짝에 붙어 있는 치마와 바지 입은 사람의 이미지를 보고, 자기 성에 맞는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인접성을 가지고 지시작용을 하는 지표(index)다. 아스팔트 위에 난 타이어 자국은 누군가 그 자리에서 급정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상징(symbol)으로, 그저 규약에 따라 지시작용을 하는 관습적 기호다. 가령 사과와 '사과'라는 말은 사이에는 유사성도, 인접성도 없다. 하지만 오랜 관습적 규약에 따라 '사과'는 사과를 가리킨다.


  그림이 '기호'라면 그것도 이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앞에서 얘기한 '회화의 발명'을 생각해 보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그 전설은 회화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입각한 도상-기호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니, 그 전설을 전달하는 그림 자체도 이미 도상-기호다. 그 안에는 남자의 그림이 있고, 여자의 그림이 있고, 그림자의 그림이 있다. 그 형상들은 닮음을 통해서 그림 밖의 남자와 여자와 그림자를 가리킨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의 모든 회화는 이렇게 닮음을 통해 사물이나 인물을 가리키는 도상-기호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예술에는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곧 예술의 기호적 성격에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예술이 도상-기호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자 소위 '추상'이라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가 등장한다. 이 회화는 더 이상 닮음을 통해 액자 밖의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기호'이기를 그친 것은 아니다. 그저 도상이 아닌 다른 것, 즉 지표나 상징으로 성격을 바꾸었을 뿐이다. 현대 회화 앞에서 대중이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추상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대중은 그것을 도상으로 보고, 그 안에서 헛되이 재현된 사물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추상을 분류할 때 우리는 그것을 흔히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으로 나누곤 한다. 그림의 성격을 분류하기 위해 온도계를 들이대는 버릇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몰라도, 적어도 추상에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물을 재현하기를 포기한 이상, 추상회화는 더 이상 도상-기호가 될 수는 없고, 뭔가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남은 것은 둘뿐이다. 지표 아니면 상징. 내가 보기에 도상이기를 포기한 회화가 이 둘 중 어느 것을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구별되는 두 종류의 추상이 성립하는 것 같다.


  먼저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보자. 몬드리안은 회화가 기호적 성격이 변해 가는 과정을 연작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 연작 속에서 나무의 형태는 점점 단순화하여 마침내 나무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도상(icon)으로 출발한 그림이 목적지에 도달했을 떄에는 현실의 나무와 전혀 닮지 않은 상징(symbol)이 된 것이다. 대개 기하학적 추상은 이렇게 도상을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 데에서 성립한다. 화가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정신적 가공을 거치면, 이미지는 대상과의 유사성을 잃어 버리고, 관습적, 규약적 기호에 가까워진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은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닮았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것들 속에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본질을 추출해내려 한다. 개별적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보는 것은 '육체'의 눈이요, 그 속에서 다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읽어내는 것은 '정신'의 눈이다. 실제로 기하학적 추상을 하는 화가들은 종종 자신들이 가시적 형태 속에 감추어진 비가시적 본질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칸딘스키도 그랬고, 몬드리안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하학적 추상은 대단히 정신주의적인 예술이다.


  그럼 '뜨거운 추상'은 어떤가? 가령 잭슨 폴록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캔버스를 수직으로 세우지 않고 수평으로 뉘어놓고 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 중력을 이용해 물감을 흘리는 소위 '드리핑'의 기법도 실은 캔버스가 바닥에 깔려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수평으로 누운 캔버스 위로 물감을 듬뿍 묻힌 핀젤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물감들이 후두둑 화면에 떨어져 여러 가지 선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작업의 대부분이 우연에 맡겨지므로, 여기서 현실의 대상을 닮은 형상이 얻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연히 흘린 커피자국이 우연히 사람의 형상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연에 의해 생성된 이 혼란스런 그림은 대체 뭘 가리키는 걸까? '닮음'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바깥의 대상을 가리킬 수는 없다. '드리핑'으로 화면에 발생한 카오스의 형상이 지시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그 위로 지나갔던 손의 움직임이다. 마치 도로 위에 찍힌 타이어 자국이 그 위로 지나간 자동차의 움직임을 암시하듯이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의 자국들은 그 위로 지나간 손의 움직임을 지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록의 작품은 지표(index)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화가의 움직임(action)의 기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액션페인팅'이라 부르는 것이다. 폴록에게 예술은 그리는 행위 그 자체였지 그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고전회화는 도상이었다. 도상이기를 포기한 현대회화는 지표나 상징으로 성격을 바꾼다. 이에 따라 현대의 추상예술도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대척점을 이룬다. 몬드리안의 작품이 영원불변한 '존재'의 상징이라면, 폴록의 작품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생성'의 지표다. 몬드리안의 추상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필연'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폴록의 추상은 디오게네스의 철학처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세계를 지향한다. 몬드리안이 손을 눈에 종속시킨다면, 폴록은 눈을 손에 종속시킨다. 그리하여 몬드리안의 작품이 정신주의적이라면, 폴록의 작품은 육체적이다.